리커창 퇴임 8개월만에 사망

리커창 퇴임 8개월만에 사망했다고 CCTV가 밝혔다. 27일 새벽 심장마비로 상하이에서 별세했다. 향년 68세이며, 같은 공청단 출신 후진타오 등에 업고 시진핑과 후계 경쟁을 했었다. 시진핑 체제에서 10년간 총리를 했으며 시진핑의 심기를 건드리는 쓴소리를 했었다.


리커창

리커창 총리의 개요

제7대 국무원 총리였다. 2012년 워자비오의 뒤를 이어 국무원 총리로 지명되었다. 1955년 7월 1일생으로 안후이성에서 출생했다. 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으로 베이징대를 정치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후진타오의 후임으로 국가주석이 될 사람이었지만 상하이방의 결렬한 반대로 태자당의 시진핑이 국가 주석이 되었다. 2013년 양회에서 정식으로 국무원 총리가 되었다. 10년의 임기를 보내고 지난 3월 11일 퇴임했었다. 정계를 떠난지 8개월만에 2023년 10월 27일 상하이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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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창의 학력

안후이성에서 출샐했지만 관리인 아버지를 따라서 허베이성에서 자랐다. 1974년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대부분의 고교 졸업자들이 농촌에 배치되었다. 리커창도 마찬가지로 시골에서 몇년간 농촌활동을 했다. 이후 마오가 사망하고 문화 대혁명이 끝나자 중앙으로 올라와 베이징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다른 총리들은 이공계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나 리커창은 법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이 77학번으로 문화대혁명 동안 대학 입시가 중단되었었다. 이 때 입학했던 사람들은 앞으로 중국을 이끌어갈 재목으로 여겨졌다. 리커창은 그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재학중 학생회장을 맡고, 82년 베이징대학 공청단 서기를 역임했다. 이어 83년에 공청단 서기국에 들어갔고 92년에는 공청단 제1서기로 등극했다. 만 37세에 장관급이 된 것이다. 이런 고속승진으로 후진타오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관리 생활중에도 학업을 병행하여 1995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논문으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학 관련 상인 ‘쑨예팡’상을 받았다.





리커창의 승승장구

리커창은 1998년 제1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 입성했다. 1999년에는 허난성의 성장이 되었다. 당시 44세로 최연소 성장이었다. 중국 동부지역의 급격한 성잔과정에서 중부 내륙의 허난에서 경제를 이끈 것을 인정받았다. 이후 2004년 동북지역인 랴오닝성의 당서기를 맡았다. 후진타오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최연소 지방 지도자란 타이틀 덕에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과 총서기로 물망에 올랐었다.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떨어졌던 시진핑이 2007년 상하이 서기로 발탁되면서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했다. 시진핑이 서열6위인 국가부주석과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맡고, 리커창은 서열 7위인 국무원 상무총리를 맡았다. 갑자기 후계구도에서 시진핑이 앞서기 시작했다. 결국 2010년 시진핑이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지명되면서 후계자 경쟁은 종료되었다. 리커창은 서열 차이를 되집지 못하고 2013년 최종적으로 국무원 총리가 되었다.





리커창의 위기

리커창 총리는 시진핑의 권력확대로 전임 총리 주룽지나 원자바오에 비해 존재감이 미약했다. 주룽지는 마오시절 두번이나 숙청되었을 정도로 자신의 주장이나 소신이 뚜렸한 인물이었다. 원자바오는 후진타오와 러닝메이트 관계여서 존재감이 꾀있었다. 리커창은 전형적인 윗사람에게 모나지 않게 출세하는 관료 스타일이기 때문에 시진핑의 카리스마에 눌려 있었다. 상무워원단의 축소로 공청단 출신이 리커창 혼자 밖에 없어 입지가 더욱 좁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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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퇴임후 공청단 계열은 자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시진핑 주석을 보좌했지만 리커창 총리가 퇴임하자 그가 출연했던 고별영상과 기사들은 소리소문 없이 소셜미디어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르게 리커창 지우기에 나서고 있다. 리커창의 죽음으로 쓸쓸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리커창의 쓴소리

리커창 총리는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져 선임 총리에 비해 미약했지만 쓴소리도 한 인물이었다. 이로인해 시진핑과 갈등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대표적으로 2020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중국인 6억명의 월수입이 1천위안에 불과하며 집세를 내기도 힘들다.”고 발언해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이 발언은 2020년까지 ‘샤오캉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시진핑의 공약이 결국 실패했다는 뜻으로 해석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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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명 높던 시진핑표 ‘제로 코로나’ 정책이 한창이던 지난해에도 “방역 지상주의가 경제를 망쳐서는 안된다.”라는 소신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이후 지난해 10월 열린 당대회에서 리커창 총리와 같은 공청단 계열은 전멸하고 시진핑 주석의 최측근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과연 앞으로의 중국은 어느 방향으로 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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