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요한 교수, 4대의 걸친 한국 사랑

인요한 교수 가정의 한국사랑은 1883년으로 올라간다. 미국의 남북장로교회는 언더우드가와 린튼가를 한국으로 파송한다. 언더우드가는 무지한 백성을 깨우기 위해 교육선교에 매진하여 연세대학교를 섭립한다. 린튼가는 2세대에 가서 해방된 한국의 인재양성을 위해 한남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인요한 교수
이 두 가정은 자녀들 모두 4대에 걸쳐 한국 사랑을 보여주었다. 남북장로교회는 하나되어 한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면 이 땅에 많은 업적을 만들었다. 린튼가는 미국남부의 신앙정통을 따라 보수적이었다. 4대째인 스티브 린튼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었했고 신학대학원은 보수적 신학인 고려신학 대학원을 나왔다.

언더우드가는 연세대학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활동했다. 린튼가는 파송 선교부의 선교지역인 호남에서 주로 활동했다. 언더우드가는 부계만 4대를 이어 한국에서 활동 했고 린튼가는 1세대는 모계로 시작하였다. 그래서 1세대가 유진 벨, 2세대는 윌리엄 린튼, 3세대는 휴 린튼과 드와이트 린튼, 4대는 인세반과 인요한이다.





린튼가의 세대별 업적을 살펴보겠다.

1세대 유진벨(배유지 1868-1925) 전남 선교의 아버지

유진벨은 호남 지방에서 주로 활동을 했다. 교육 사업에 힘을 쏟았으며 교회와 많은 학교를 설립했다. 남장로교회에서 세운 학교는 교회가 설립된 곳을 중심으로 남학교와 여학교를 세웠다. 미국식 교육을 통해 문맹퇴치와 함께 호남지역에 신학문을 도입하였다. 1900년도 초에 설립된 목포에 정명여고와 영흥학교가 있다. 광주에는 숭일학원과 수피아여학교가 있으며 순천에는 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외에서 미국 남장로교회에서는정식학교로 발전하지 않은 많은 학교들이 있었다.


인요한 교수
유진벨에 위해 세워진 교회들도 많이 있다. 목포를 중심으로 양동교회, 양동제일교회, 새한교회, 목포창조교회를 설립하였다. 광주에서는 잉계교회, 양림교회, 북문안교회를 세웠다. 1925년 9월 28일 57세 나이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현재는 광주시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2세대 윌리엄 린튼(1891-1960, 인돈) 한남대학교 설립

1891년 미국 조지아에서 출생 하였다. 조지아공대를 수석 졸업했으며, 어미니 사망 후 선교사로 결심 22살에 한국으로 왔다. 1917년 영명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후원 주도하였다. 한국의 독림을 외국신문을 통해 주장했으며 군산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이 공로를 인정해 한국정부는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일제 때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되어 잠시 한국을 떠났었다. 해당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전북전주에 성서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러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과 일본을 여러차례 다녀오게 되었다. 이와중에도 대전기독학관을 설립하였다. 1959년 한남대학교의 전신인 대전대학을 설립하였다. 말년에는 암으로 고생하시다 1960년 10월 13일 삶을 마감하였다.





3세대 휴 린튼(1926-1984, 인휴)과 드와이트 린튼(1927-2010, 인도아)

휴 린튼(인휴) 군산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순천에서 보냈으며 교육은 미국에서 받으며 자랐다. 컬럼비아신학대학교에서 공주를 하였다. 1930년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으로 왔지만 1940년 일제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해군 대위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였다. 한국에서 선교와 의료봉사를 주로 하였다. 등대선교회를 섭립하여 전라남도 순천을 중심으로 도서지역에 60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의 아내인 인애자와 함께 30여년간 결핵퇴치 활동에도 매진하였다.  1960년 순천일대에 홍수가 나고 결핵이 크게 유행하지 순천기독치료소를 만들어 결핵치료에 나섰다. 아내인 인애자는 순천결핵재할원을 설립하여 은퇴할 때까지 결핵퇴를 위해 헌신하였다. 인휴 선교사는 1984년 뜻밖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드와이트 린튼은 1927년 전주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평양에서 자랐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콜럼비아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1955년에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와 광주에서 20년이 넘도록 의료봉사를 하였다. 1973-1978년에는 호남신학대학장을 맡아 신학교의 발전에도 공헌하였다. 은퇴 후에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방북 때 통역의 일도 맡기도 하였다. 1955년 북한주민 돕기 위한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을 설립하였다. 의료와 식량 농기계 비상구호품 우물개발기술 전수 등 대북 인도적 지원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91년에는 한국계 미국인 2세들과 함께 오픈도어 커뮤니티 교회를 열었다. 2010년 애틀란타 인근 한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한 뒤 귀가하다 교툥사고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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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대 스티브 린튼(1950-현재, 인세반)과 존 린튼(1959-현재, 인요한)

휴 린튼 선교사의 자녀들은 엄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중학생이 되면 107개의 소요리 문답을 외웠다. 암송하다 틀리면 매를 맞았다고 한다. 신앙과 삶의 가치 정립을 위한 휴 린튼만의 교육방법이었다.

스트브 린튼은 1950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이후 대부분 한국에서 자랐다. 매산고, 연세대, 고려신학대학교를 마쳤다. 콜롬비아대학의 한국학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 배우고 자랐기 때문에 분단현실에 대해 잘알고 있었다. 197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탁구대회를 계기로 북한을 방문하게 되면서 북한에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1995년부터 1996년에 북한의 홍수로 인해 많은 피해가 있었는데 북한의 홍수 구호를 위해 도움을 주었다. 또 유진 벨 프로젝트를 출범시켜 북한의 결핵퇴치를 위주로 한 의료지원에 400억원이 넘는 의약품과 의료장비를 지원했다.


존 린튼은 1959년에 태어났다. 매산고와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가정의학과 교수이며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다. 형과 함께 유진 벨재단을 적극 후원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인요한은 한국 특별귀화 1호다. 공식적으로 순천 인씨 시조가 되었다. 인세반과 인요한은 모두 한국여성을 부인으로 맞았다. 지금은 국민의 힘 혁신위원장을 맡고 있다.


인요한 교수
인요한의 아버지인 휴 린튼은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하였다. 음주운전을 하던 버스와 추돌사고로 휴 린튼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사고 당시 휴 린튼의 지프차에는 농촌교회에 쓰일 건축자재을 실은 트레일러를 달고 있었고 농촌 교회로 가고 있었다. 그의 어미니인 로이스 베티는 결핵퇴치를 위해 35년간 헌신하였다. 한국인의 결핵 치료와 예방을 위해 평생 헌신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호암상을 받았다. 이 때 받은 상금으로 존 린튼은 한국형 앰뷸런그 개발과 보급에 결정적인 게기를 마련하였다. 그전까지는 제대로 앰뷸런스도 없어서 택시를 타고 광주로 가다가 순직한 그의 부친을 생각하고 제작했던 것이다. 휴 린튼은 죽어서도 한국민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주고간 것이다. 이렇게 인요한 교수의 4대의 걸친 한국 사랑은 현재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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